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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 삼익파크 이희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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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마을센터 댓글 0건 조회 850회 작성일 20-04-2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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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출발하는 강동구마을지원센터가 2020년, 새로운 마을살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 마을 구석구석을 탐구했던 지난해에 이어 관내에 유관기관들을 알아보는 THEMA.1 마을공동체가 자란다,  마을을 살아가는 주민공동체의 활약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THEMA2. 마을을 움직이는 사람들, 강동의 과거에서 미래를 조망해 보는 THEMA3. 나의 살던 마을은 까지 세 가지 테마로 기획되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여러분을 강동사랑으로 이끌  시리즈 '강동을 살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THEMA3.  나의 살던 마을은 : 마을 어르신이 살아온 강동 이야기 


#3_"정든 강동에서 끝까지 살 거예요."   

      길동 삼익파크에서 40여 년째 거주해 온  이희원 씨



"갑자생은 팔자가 좋다고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전쟁도 겪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나처럼 잘 살기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 97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정하고 고운 이희원 할머니. 80년대 초, 강동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설 때, 길동의 삼익파크 아파트를 처음 분양받아 입주했다. 이후 4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이 동네와 이 집에 정을 붙이고 살았다. 이희원 할머니에게 강동은 은퇴 이후의 삶을 새로 시작하고 또 마무리하게 될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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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바깥출입을 전혀 할 수 없어 대신 집안에서 소소한 일거리들을 찾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지낸다. 화초와 물고기 키우기, 책 읽기, 성경 필사하기와 함께 아직도 웬만한 청소나 부엌일은 남에게 미루지 않고 스스로 한다.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아직까지 바늘을 손에서 놓지 않아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수세미와 목도리, 덧신, 발판, 바늘꽂이 등 이희원 할머니의 작품을 안 가진 삼익파크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동안 만들어서 기부하고 이웃에 나눠 준 수예품만 해도 수백 점이 넘는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바로 마주 보는 집에 사는 큰 딸 내외가 할머니에게 큰 힘과 의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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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에 비해 무척 건강해 보이시는데 특별히 아픈 데는 없나요?

▶"무슨. 다리 힘도 없고 허리도 아프고 귀도 안 들리고 시력도 부실하고 얼굴도 엉망이고 살도 죄 빠지고... 입으로는 행복합니다 하지만 기력이 딸리니 자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함께 여행 다녔던 사범학교 친구 열몇 명중에 다 죽고 나까지 세 명 남았는데 한 친구는 누워 있고 한 친구는 걷지를 못해 카톡이나 하는데 나는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 개중 제일 건강하기는 해요."

 

▷강동구에는 어떻게 들어왔나요?

▶"은평구 역촌동의 제법 괜찮은 양옥집에서 시집간 큰 딸네와 산책하면 10분 거리에 살았어요. 그런데 여기 아파트 건설 주가 큰 사위랑 친구였는데 자기네들 이사하면서 함께 가겠느냐고 묻길래 두말 않고 따라왔어요. 양옥을 팔아도 돈이 부족해서 사위가 보태줬죠. 여기가 '맨션아파트'여서 그때도 가격이 꽤 나갔어요. 나중에 만기 된 적금을 찾아서 보태준 돈은 다 갚았어요. 이자도 주려 했지만 사위가 칠색 팔색 하는 바람에.... 우리 사위는 그야말로 1등 사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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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파트 같은 라인 같은 층에서 40여 년간 함께 사셨는데.... 별일 없으셨어요? 친정엄마랑 딸은 애증으로 얽혀 보통 많이 싸우잖아요?

▶"우리 사위가 올해 80세, 딸이 74세예요. 언젠가 그러더라고요. 어머니 혼자 사시는데 못 모셔서, 저 죽어서 천당 못 갈 거예요. 자꾸 합치자고 하는데 내가 혼자 살겠다고 했어요. 문만 열면 바로 딸집이고 내 몸 움직여서 청소하고 반찬 할 수 있는데... 근데 요즘은 조금 힘들어 맨날 드러누워요. 자식들 마음을 아는데 뭐 부딪칠 일이 있겠어요?"

 

▷자녀를 따라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도 강동구에 평생 머물기로 한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나요?

▶"공기도 좋고 병원, 대형마트, 공원, 아트센터가 집 가까이 있어서 볼 것도 많고 시설도 많고 그야말로 다 좋아요. 무엇보다 성당 식구들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챙겨주고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동네 사람들이 참 순하고 다정해요. 강남 사는 아들이 같이 살자고 하지만 그쪽으로 갈 생각이 없습니다. 강동구에 정이 너무 많이 들어서 나, 이희원 할머니는 강동구에서 나가라 해도 안 나갈 거예요. 끝까지 살렵니다."

 

1924년 갑자생인 이희원 할머니의 고향은 종로 3가 100번지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 유복하고 넉넉한 집안에서 부모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 시절에 피아노를 배우고 유치원에도 다녔다고 한다. 경성유치원, 교동 국민학교를 거쳐 현재 경기여고와 현 서울대 사범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여자사범학교 연습과를 졸업하고 바로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발령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때여서 일본인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영리하고 야무졌던 이 할머니는 뭐든 똑 부러지게 해내 곧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첫 부임지가 경기도 김포에 있는 학교여서 종로에서 매일 출근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성실하게 다니다가 2년 뒤 서울 청계 국민학교로 옮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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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학교 다니는 여성도 드물었던 시절에 명문학교를 나와 직장 생활을 하신 신여성이었군요. 그래도 결혼하고 나서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네, 22살에 집안 중매로 4살 위 남편을 만나 결혼했어요. 그전에 사표를 내니까 일본인 교장이 자꾸 반려하며 신랑 데려오라 그러대. 자기가 설득한다고. 그때는 여자가 직업을 가지면 불행한 삶이고 남편 밥을 먹어야 당연한 걸로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만 둘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 결혼생활은 어떠셨어요? 보통 옛날에는 시댁에서 층층시하 모시고 살았잖아요.

▶"한남동 시댁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어요. 결혼하고 살던 집은 민속촌의 99칸 집과 많이 비슷했어요. 시할머님은 본채의 안방을 쓰시고 시어머님은 건넌방, 맞 동서네는 아래채, 둘째 동서네는 같은 대문을 들어와 갖춰진 앞채에서 살았고 우리는 정원을 가운데 끼고 있는 큰 사랑채에서 지냈는데 집이 완전 한 채로 되어있고 그야말로 너무나도 근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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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19식구, 시댁 19식구에 주변에 친척들도 많았고 손님들도 끊임없이 드나들어 만날 잔칫집 같았어요. 저의 집이 큰 집이라 무슨 때가 되면 굉장했습니다. 늘 바쁘게 사람들과 복닥거리며 살아도 피곤한 줄 모르고 적응하며 잘 지냈습니다.

시댁은 정미소를 하고 농사를 크게 지어 귀한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광도 여럿이고 장작, 솔나무, 쌀, 농작물로 가득, 장독대의 독마다 가득해서 자급자족이 가능했어요. 나한테는 주로 물을 길어 독에 채우는 일, 마당 청소, 빨래 같은 밖의 일을 시키고 부엌일, 음식은 동서들이 담당했어요. 각 방에서 나오는 빨래는 지게에 싣고 바로 앞 한강 가에 나가 빨았고 새참을 만들어 놓으면 지금의 잠실 근처에 있는 논에 가져다주고 했어요.

인절미도 마당 한가운데에 암반 놓고 찰밥 쪄서 쏟아놓고 장정들이 철썩철썩 쳐서 만들고 시어머니께서 목판에 담아 앞앞이 주셨어요. 고사를 지내게 되면 큰 시루가 몇 개씩 나오고 이집 저집 푸짐하게 돌렸지요. 큰 살림이었어요."

 

▷시할머니에 동서도 있고 그렇게 큰 살림을 했다면 어쩐지 대단한 시집살이를 했을 거 같은데요?

▶"아직 어린애가 있기 전이라 안채에서 시어른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고 저녁이 되면 주무실 자리, 정리해 드리고 재미있는 소설을 읽어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어요. 늦게 제 방으로 돌아오면 바느질을 시작, 한복도 짓고 와이샤쓰도 많이 지었는데 시삼촌께도 드리곤 했지요. 공부만 한 줄 알았던 애가 제법 맵시 있게 옷도 짓고 일거리를 놔두고 보는 성질이 아니라 부리나케 해치우곤 하니까 눈에 띄게 예뻐하셨어요. 큰 딸을 낳았을 때 유독 귀여워하시니 동서 특히 맞동서가 대놓고 미워하더라구요. 시어머니 시집살이보다 동서 시집살이가 더 맵다더니.... 내가 당했지요. 몸이 아파 좀 누워있으면 쇠솥뚜껑 두드리는 소리, 도마 쪼개져 나가는 거 같은 소리가 사랑채까지 건너와요. 하두 소란스러워 누워있을 수가 없었어요. 결국 시댁에서 독립하기로 맘먹고 아현동에 집을 얻어 나왔는데 그때가 25세였어요. 무슨 용기였는지 몰라..."

 

▷살면서 동서 시집살이 말고는 특별히 힘든 일이 없었나요?

▶"그 큰 살림 놔두고 그야말로 빈 몸으로 나와 남편 공무원 월급으론 먹고살기 어려워 바로 복직 신청을 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삼청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이 제 이력서를 보고 집으로 찾아오셨더라고요. 당장 나오라고 해서 바로 일을 시작했어요. 퇴근 후에는 과외지도를 하며 열심히 살았지요. 그런데 6.25전쟁이 나는 바람에 친정식구들과 충청도 이모님 시댁으로 피난을 갔어요. 남자들은 다 국민병으로 나가고 여자들만 있으니 내가 가장이 되어 닥치는 대로 떡도 팔고 엿도 팔고 찐빵도 팔고 시장에서 옷감도 팔고 정말 별 경험을 다하며 대가족을 이끌었습니다. 서울수복 후 한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올 때, 유엔군과 군인들을 찾아다니며 도강증을 만들고 배급 쌀을 받아 식구들을 먹였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걸 혼자서 다 해냈어요. 수복 직후에는 천막에서 수업했고 제대로 된 학교로 돌아간 후에는 낙원동에서 단칸 셋방살이를 하며 악착같이 살았어요. 33살 때, 연건동에 조그마한 한옥을 장만하여 거기서 큰 딸 시집갈 때까지 20년을 살다가 역촌동을 거쳐 여기 길동에 자리를 잡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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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에 들어왔을 때도 선생님이셨지요? 그럼 여기서 정년퇴임을 하신 건가요?

▶"마지막 학교가 광진구에 있었어요. 거기서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결혼 때문에 몇 년 쉰 것 말고는 줄곧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환갑을 지나서도 현장에 머물렀네요. 이 아파트에서 자식들이 환갑잔치를 열어줬는데 딸네 집이랑 우리 집이랑 문을 열고 양쪽 집에서 2박 3일간했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 선생님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오는 바람에 방마다 손님이 꽉꽉 찼던 기억이 나요. 수백 명이 다녀갔을 거예요."

 

▷다시 한번 여쭐게요. 강동에서 쭉 사시려는 이유가 뭔가요?

▶9월이면 남편이 세상을 뜬지 만 4년이 됩니다. 70년 넘게 함께 했네요. 여기 길동 성당 영안실에서 잘 모시고 하늘나라로 보내드렸지요. 성당 식구들이 보여준 헌신, 우리 아이들도 그 감동을 결코 잊지 못하겠다고 해요. 또 이 집에 와서 셋째 딸도 시집보내고 며느리도 봤습니다. 아들이 자꾸 합치자고 하지만 바로 옆집에 큰 딸내외가 아들 못지않게 든든하고 함께 강동아트센터도 다니고 생태공원이나 일자산 산책도 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어요. 강동구를 떠날 이유가 없지요. 사람도 좋고 환경도 좋고 자식도 옆에 있고... 강동이 너무 좋아요. 끝까지 강동구에서 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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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르신들은 대부분 삶 자체가 여러 권 분량의 대하소설 감인 경우가 많다. 역사의 질곡 안에 개인사를 엮으며 한 세상, 한 시절을 견디며 넘어왔다.

이희원 할머니의 삶은 비교적 평탄하고 행복했다. 유복한 집안의 똑똑한 장녀라는 타이틀을 가졌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며 주변 사람들을 챙겼다. 품위 있는 삶이었다.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할 강동구와의 만남은 우연이면서도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나고 자라진 않았지만 이희원 할머니에게 강동은 그에 못지않은 의미가 됐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것도 원할 것도 없이 강동에서 지금처럼만 살았으면 싶다.

 


                                                                                                                             <강동마을기록활동가   유  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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